귀신들렸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쫓겨난 성도,다시 전도자로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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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211.♡.223.98) 작성일 26-08-16 09:09 조회 23 댓글 0본문
귀신들렸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쫓겨난 성도, 다시 전도자로 서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한 사람
그 사람은 처음부터 교회를 싫어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교회를 사랑했다.
주일이면 예배를 드렸고, 찬양을 좋아했고, 힘들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며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삶에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심한 두려움이 찾아왔다.
혼자 있으면 이유 없이 불안해졌고, 잠을 자려고 하면 몸이 굳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뛰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으며,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말을 하거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순간도 있었다.
본인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목사님,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해 주세요.”
처음에는 함께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수군거렸다.
“저 사람 귀신 들린 것 아니야?”
누군가는 가까이 오는 것을 꺼렸다.
“혹시 저 사람 때문에 우리에게도 무슨 일이 생기는 것 아니야?”
그리고 어느 날, 결국 교회에서 나가 달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순간 그 사람의 마음은 무너졌다.
몸이 아픈 것도 서러운데, 마음이 무너지는 것도 견디기 어려운데, 자신이 사랑했던 교회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상처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속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님도 나를 버리신 것일까?’
그날 밤 그는 오래 울었다.
“하나님,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정죄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회복이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정죄받지 않는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이상한 행동을 보면 쉽게 결론을 내린다.
“귀신 들렸다.”
“믿음이 부족하다.”
“죄가 많아서 그렇다.”
“기도를 안 해서 그렇다.”
그러나 한 사람의 고통을 그렇게 단순한 한마디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영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심리적·정서적인 문제일 수도 있으며, 의학적인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때로는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축사사역은 사람을 겁주는 일이 아니다.
사람을 정죄하는 일도 아니다.
더구나 모든 이상 증상을 무조건 귀신의 역사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인 분별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을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그때 한 사람이 주깁볼목사님을 소개했다.
“한번 상담받아 보세요. 기도받아 보세요. 그런데 너무 두려워하지는 마세요.”
그 말을 듣고도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또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면 어떡하지?’
‘또 귀신 들렸다고 정죄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던 그는 조심스럽게 찾아왔다.
“목사님, 저는 귀신 들린 사람인가요?”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물이 먼저 흘렀다.
주깁볼목사님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자신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그리고 결국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까지 하나씩 꺼내놓았다.
마지막에는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제가 정말 귀신 들린 사람인가요?”
그 질문에는 단순한 호기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버림받은 사람인가?’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나는 앞으로도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절망이 담겨 있었다.
주깁볼목사님은 먼저 그 사람을 정죄하지 않았다.
“사람을 먼저 귀신이라고 규정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확하게 분별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누군가가 처음으로 자신을 ‘문제’가 아니라 ‘사람’으로 대해 주었기 때문이다.
기도는 두려움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다
기도가 시작되었다.
그 기도의 중심에는 특정한 현상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의 주인이십니다.”
“두려움은 떠나가고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마음을 붙들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거짓과 정죄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필요한 모든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그 사람은 처음에는 몸을 떨기도 했다.
감정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상 자체가 아니었다.
사역의 목적은 사람에게 특별한 반응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서도록 돕는 것이었다.
기도가 계속되면서 그는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눌러두었던 상처가 하나씩 드러났다.
버림받았다는 기억.
사람들에게 조롱받았던 기억.
자신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바라보던 시선.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마저 버리셨을 것이라는 두려움.
주깁볼목사님은 그에게 계속 복음을 전했다.
“사람이 여러분을 버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 한마디가 그의 마음에 깊이 들어갔다.
회복은 한 번의 기도로 끝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은 축사와 치유를 한 번의 사건으로 생각한다.
기도를 받고 즉시 모든 것이 끝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적인 회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수 있다.
기도 이후에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하고, 말씀을 배워야 하며,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전문적인 상담이나 의료적인 도움도 함께 받아야 한다.
그 사람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아침에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떤 날은 다시 불안해졌다.
어떤 날은 과거의 상처가 떠올랐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이제 그는 혼자 싸우지 않았다.
기도하는 법을 배웠고, 말씀을 붙드는 법을 배웠으며, 자신의 감정과 몸의 상태를 살피는 법도 배워갔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귀신 들린 사람’으로 규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고백하기 시작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먼저 기도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기도를 받기만 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교회에 온 새신자가 힘들어하면 다가갔다.
“제가 함께 기도해 드릴게요.”
누군가 눈물을 흘리면 옆에 앉아 주었다.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자신이 경험했던 아픔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는 자신의 고통 때문에 사람을 피했다.
그러나 이제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꼈던 경험 때문에,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자신이 정죄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조금씩 전도자로 세워졌다.
“제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어느 날 그가 주깁볼목사님에게 말했다.
“목사님, 저도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주깁볼목사님이 물었다.
“왜 전도하고 싶습니까?”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제가 죽을 것 같았을 때 누군가 저에게 예수님을 전해 주셨습니다. 제가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이제 저도 다른 사람에게 그 예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는 과거의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사명이 담겨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물론 과거의 상처를 자랑하지도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상처를 통하여 자신을 어떻게 회복시키셨는지를 간증하기 시작했다.
“저도 한때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의 간증을 듣는 사람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생겼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마음속으로 같은 질문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전도자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다
그가 전도자로 세워진 것은 그가 완벽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과거에 아무 문제가 없었던 사람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과 실패와 상처를 경험했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원칙이 있다.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회복되었으니 당신도 똑같이 해야 한다.”
그렇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필요한 도움도 다르다.
전도자는 자신의 경험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영적인 분별이 필요한 경우에는 목회적 돌봄과 함께 상담·의료적 평가가 필요한지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그것이 오히려 사람을 사랑하는 길이다.
과거의 ‘문제아’가 오늘의 전도자가 되다
시간이 흐른 뒤 그 사람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를 처음 보았던 사람들은 쉽게 믿지 못했다.
“정말 그 사람이 맞습니까?”
예전의 모습과 너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제가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 한마디가 그의 간증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규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마지막을 결정할 권리는 사람에게 없다.
어제의 실패가 오늘의 정체성이 될 필요도 없다.
과거의 상처가 평생의 운명이 될 필요도 없다.
교회에서 받은 상처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내게 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무너진 사람을 다시 일으키실 수 있다.
상처 입은 사람을 다시 사용하실 수 있다.
실패한 사람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실 수 있다.
진짜 기적은 사람이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축사사역에서 우리는 때때로 강한 현상만을 기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더 깊은 기적은 사람이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가족에게 다시 다가가는 것.
교회 공동체 안에서 건강하게 예배드리는 것.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
그리고 자신처럼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것.
이것 역시 놀라운 회복이다.
그 사람이 전도자가 된 것도 바로 그런 회복의 열매였다.
한때는 교회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이제는 사람들을 교회와 예수님께 인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한때는 “나는 버림받았다”고 울었던 사람이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한때는 자신을 문제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사람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
이 이야기를 통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교회는 고통받는 사람을 가장 먼저 정죄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교회는 영적인 분별을 해야 한다.
귀신의 역사라고 주장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성경적으로 분별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정신적·정서적·의학적인 가능성도 함께 살펴야 한다.
사역자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
두려움을 더해서는 안 된다.
축사사역의 중심도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신유사역의 중심도 사역자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여야 한다.
전도의 중심도 자신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의 인생을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오늘 교회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내일의 전도자가 될 수도 있다.
오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내일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오늘 자신을 아무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내일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쉽게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쉽게 낙인찍지 말아야 한다.
기도하고, 말씀으로 분별하고, 필요한 도움을 연결하고, 사랑으로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할 수도 있다.
교회에서 쫓겨난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문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지막을 그렇게 쓰지 않으셨다.
그는 회복되었다.
다시 예배하게 되었다.
다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복음을 들고 다른 사람에게 찾아가는 전도자가 되었다.
사람은 과거를 보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보신다.
사람은 상처를 보지만,
하나님은 그 상처 너머의 사명을 보신다.
사람은 실패를 보지만,
하나님은 다시 일어설 가능성을 보신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사역의 문을 여신다.
그것이 은혜다.
그것이 회복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인생이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한 사람
그 사람은 처음부터 교회를 싫어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교회를 사랑했다.
주일이면 예배를 드렸고, 찬양을 좋아했고, 힘들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며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삶에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심한 두려움이 찾아왔다.
혼자 있으면 이유 없이 불안해졌고, 잠을 자려고 하면 몸이 굳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뛰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으며,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말을 하거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순간도 있었다.
본인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목사님,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해 주세요.”
처음에는 함께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수군거렸다.
“저 사람 귀신 들린 것 아니야?”
누군가는 가까이 오는 것을 꺼렸다.
“혹시 저 사람 때문에 우리에게도 무슨 일이 생기는 것 아니야?”
그리고 어느 날, 결국 교회에서 나가 달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순간 그 사람의 마음은 무너졌다.
몸이 아픈 것도 서러운데, 마음이 무너지는 것도 견디기 어려운데, 자신이 사랑했던 교회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상처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속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님도 나를 버리신 것일까?’
그날 밤 그는 오래 울었다.
“하나님,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정죄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회복이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정죄받지 않는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이상한 행동을 보면 쉽게 결론을 내린다.
“귀신 들렸다.”
“믿음이 부족하다.”
“죄가 많아서 그렇다.”
“기도를 안 해서 그렇다.”
그러나 한 사람의 고통을 그렇게 단순한 한마디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영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심리적·정서적인 문제일 수도 있으며, 의학적인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때로는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축사사역은 사람을 겁주는 일이 아니다.
사람을 정죄하는 일도 아니다.
더구나 모든 이상 증상을 무조건 귀신의 역사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인 분별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을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그때 한 사람이 주깁볼목사님을 소개했다.
“한번 상담받아 보세요. 기도받아 보세요. 그런데 너무 두려워하지는 마세요.”
그 말을 듣고도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또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면 어떡하지?’
‘또 귀신 들렸다고 정죄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던 그는 조심스럽게 찾아왔다.
“목사님, 저는 귀신 들린 사람인가요?”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물이 먼저 흘렀다.
주깁볼목사님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자신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그리고 결국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까지 하나씩 꺼내놓았다.
마지막에는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제가 정말 귀신 들린 사람인가요?”
그 질문에는 단순한 호기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버림받은 사람인가?’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나는 앞으로도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절망이 담겨 있었다.
주깁볼목사님은 먼저 그 사람을 정죄하지 않았다.
“사람을 먼저 귀신이라고 규정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확하게 분별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누군가가 처음으로 자신을 ‘문제’가 아니라 ‘사람’으로 대해 주었기 때문이다.
기도는 두려움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다
기도가 시작되었다.
그 기도의 중심에는 특정한 현상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의 주인이십니다.”
“두려움은 떠나가고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마음을 붙들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거짓과 정죄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필요한 모든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그 사람은 처음에는 몸을 떨기도 했다.
감정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상 자체가 아니었다.
사역의 목적은 사람에게 특별한 반응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서도록 돕는 것이었다.
기도가 계속되면서 그는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눌러두었던 상처가 하나씩 드러났다.
버림받았다는 기억.
사람들에게 조롱받았던 기억.
자신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바라보던 시선.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마저 버리셨을 것이라는 두려움.
주깁볼목사님은 그에게 계속 복음을 전했다.
“사람이 여러분을 버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 한마디가 그의 마음에 깊이 들어갔다.
회복은 한 번의 기도로 끝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은 축사와 치유를 한 번의 사건으로 생각한다.
기도를 받고 즉시 모든 것이 끝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적인 회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수 있다.
기도 이후에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하고, 말씀을 배워야 하며,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전문적인 상담이나 의료적인 도움도 함께 받아야 한다.
그 사람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아침에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떤 날은 다시 불안해졌다.
어떤 날은 과거의 상처가 떠올랐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이제 그는 혼자 싸우지 않았다.
기도하는 법을 배웠고, 말씀을 붙드는 법을 배웠으며, 자신의 감정과 몸의 상태를 살피는 법도 배워갔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귀신 들린 사람’으로 규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고백하기 시작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먼저 기도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기도를 받기만 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교회에 온 새신자가 힘들어하면 다가갔다.
“제가 함께 기도해 드릴게요.”
누군가 눈물을 흘리면 옆에 앉아 주었다.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자신이 경험했던 아픔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는 자신의 고통 때문에 사람을 피했다.
그러나 이제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꼈던 경험 때문에,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자신이 정죄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조금씩 전도자로 세워졌다.
“제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어느 날 그가 주깁볼목사님에게 말했다.
“목사님, 저도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주깁볼목사님이 물었다.
“왜 전도하고 싶습니까?”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제가 죽을 것 같았을 때 누군가 저에게 예수님을 전해 주셨습니다. 제가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이제 저도 다른 사람에게 그 예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는 과거의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사명이 담겨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물론 과거의 상처를 자랑하지도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상처를 통하여 자신을 어떻게 회복시키셨는지를 간증하기 시작했다.
“저도 한때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의 간증을 듣는 사람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생겼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마음속으로 같은 질문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전도자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다
그가 전도자로 세워진 것은 그가 완벽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과거에 아무 문제가 없었던 사람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과 실패와 상처를 경험했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원칙이 있다.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회복되었으니 당신도 똑같이 해야 한다.”
그렇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필요한 도움도 다르다.
전도자는 자신의 경험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영적인 분별이 필요한 경우에는 목회적 돌봄과 함께 상담·의료적 평가가 필요한지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그것이 오히려 사람을 사랑하는 길이다.
과거의 ‘문제아’가 오늘의 전도자가 되다
시간이 흐른 뒤 그 사람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를 처음 보았던 사람들은 쉽게 믿지 못했다.
“정말 그 사람이 맞습니까?”
예전의 모습과 너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제가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 한마디가 그의 간증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규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마지막을 결정할 권리는 사람에게 없다.
어제의 실패가 오늘의 정체성이 될 필요도 없다.
과거의 상처가 평생의 운명이 될 필요도 없다.
교회에서 받은 상처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내게 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무너진 사람을 다시 일으키실 수 있다.
상처 입은 사람을 다시 사용하실 수 있다.
실패한 사람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실 수 있다.
진짜 기적은 사람이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축사사역에서 우리는 때때로 강한 현상만을 기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더 깊은 기적은 사람이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가족에게 다시 다가가는 것.
교회 공동체 안에서 건강하게 예배드리는 것.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
그리고 자신처럼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것.
이것 역시 놀라운 회복이다.
그 사람이 전도자가 된 것도 바로 그런 회복의 열매였다.
한때는 교회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이제는 사람들을 교회와 예수님께 인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한때는 “나는 버림받았다”고 울었던 사람이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한때는 자신을 문제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사람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
이 이야기를 통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교회는 고통받는 사람을 가장 먼저 정죄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교회는 영적인 분별을 해야 한다.
귀신의 역사라고 주장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성경적으로 분별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정신적·정서적·의학적인 가능성도 함께 살펴야 한다.
사역자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
두려움을 더해서는 안 된다.
축사사역의 중심도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신유사역의 중심도 사역자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여야 한다.
전도의 중심도 자신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의 인생을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오늘 교회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내일의 전도자가 될 수도 있다.
오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내일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오늘 자신을 아무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내일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쉽게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쉽게 낙인찍지 말아야 한다.
기도하고, 말씀으로 분별하고, 필요한 도움을 연결하고, 사랑으로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할 수도 있다.
교회에서 쫓겨난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문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지막을 그렇게 쓰지 않으셨다.
그는 회복되었다.
다시 예배하게 되었다.
다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복음을 들고 다른 사람에게 찾아가는 전도자가 되었다.
사람은 과거를 보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보신다.
사람은 상처를 보지만,
하나님은 그 상처 너머의 사명을 보신다.
사람은 실패를 보지만,
하나님은 다시 일어설 가능성을 보신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사역의 문을 여신다.
그것이 은혜다.
그것이 회복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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